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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 좌담회] 우수 인력들 부모 반대로 '대기업행 고집' 안타까워

이번 기획은 단순한 기업 소개에 그치지 않고 최고경영자(CEO)의 경영철학과 고민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이에 대해 딜로이트가 지면 컨설팅을 해주는 식으로 구성됐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지난 3일 이노패스트 기업 CEO 가운데 4명을 초청해 좌담회를 열었다. 이들은 인재 발굴의 어려움, 정부에 대한 정책 건의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남윤호 금융증권 데스크= 취재 과정에서 남다른 성공 스토리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성공의 비결 위기 극복 과정 등 후배 기업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많을 것 같다. ▶박용석 DMS 사장=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했지만 기업 인지도가 낮아 어려움이 컸다. 뜻밖에도 2003년 전 세계를 강타한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 우리에겐 기회가 됐다. 사스로 일본.한국의 경쟁사들이 철수할 때 우리는 오히려 시장을 공략하는 역발상 전략을 택했다. 이후엔 대기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고객을 다각화한 전략도 주효했다. ▶김철영 미래나노텍 사장= 제품 개발 단계에선 기업하는 게 즐거웠다. 오히려 대량 생산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성장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큰 어려움을 겪었다. 원자재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매출과 수익성이 급격히 나빠진 것이다. 회사가 망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돌이켜보니 원가라는 개념조차 없이 사업하는 등 내부 관리에 문제가 많았다. 내부 요인을 체계적으로 정비해 나가기 시작한 지 1년여가 지나면서 서서히 고객 신뢰를 회복했고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재원 슈프리마 사장= 제품을 개발했지만 국내에선 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앞서 나온 지문인식 제품이 엉망이어서 우리도 도매금으로 취급됐다. 어쩔 수 없이 해외시장을 공략할 수밖에 없었고 어려움도 컸지만 결국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연구소장을 맡던 임원이 마케팅을 하는 등 새로운 시도도 많이 했다. ▶조정일 케이비테크놀러지 사장= 교통카드 사업으로 코스닥시장에 상장도 했지만 오래 지속할 사업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결국 2005년 스마트카드의 운영체제(OS) 분야로 업종을 전환했다. 그 과정에서 은행의 자금 회수 인력 구조조정 등 경영자로서 겪은 고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다행히도 인프라에 많이 투자해 현금성 자산을 200억원가량 확보해둔 게 사업 전환에 큰 도움이 됐다. 엉뚱한 데 투자해 현금 여유가 많지 않은 기업이라면 사업 전환은커녕 고스란히 회사를 접을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이재일 딜로이트 성장혁신센터장= 회사마다 성공에 이른 경영비법이 있을 것 같은데. ▶박용석=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원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다. 체질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직원들의 환경을 의도적으로 바꿔줄 필요가 있다. 환경이 바뀌어야 창의적 사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종종 순환보직을 통해 환경을 바꾸려 노력한다. ▶조정일= 직원들이 본질적인 문제점엔 공감하면서도 해결 방안을 제시하면 태도가 180도 바뀌곤 한다. 해결 방안을 실행하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가 드러나고 불편해지는 게 싫은 것 같다. 그걸 설득하고 이끌고 나가는 게 힘들었다. ▶김철영= 경영에서 제일 힘든 것은 여러 가지 요소를 적절하게 조화하는 일이다. 인사.재무.조달.기술 등이 한 곳에 모이면서 강력한 힘이 발생하는 법이다. 이런 조화를 위해 신규 인력을 채용할 때에도 다양한 이력을 가진 사람을 선발한다. ▶이재일= 성장 과정에서 갈등도 많았을 것 같다. 과거 100억원 매출일 때 뽑았던 사람이 500억원대 매출에서는 제대로 일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김철영= 10명을 데리고 일할 때는 잘 하던 사람이 100명이 일하는 기업이 되면 능력을 발휘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는 못하면서 남들도 못하게 길을 막는다는 것이다. ▶조정일= 창업 멤버 15명 중에서 지금은 두 명밖에 안 남았다. '같이 변하자'고 했는데 쉽지가 않더라. ▶남윤호= 중소기업들이 인력 채용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노패스트 기업도 마찬가지인가. ▶조정일= 인력 채용하기가 너무 힘들다. 아예 단념하고 해외사업 분야에선 현지 우수 인력을 채용하고 있다. 국내에서 우수한 젊은 인력을 채용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부모님의 의식이다. 본인이 좋다고 해도 부모님의 고집 때문에 결국은 대기업행을 택하고 마는 경우를 많이 봤다. 대기업 수준으로 급여를 지급해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다. ▶이재원= 선발한 인력을 조직과 융합시키는 것도 숙제다. 우리는 나름대로 독특한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회사가 원하는 대로 바뀔 수 없기에 개인적인 부분과 조직적인 것을 조화시키려 많이 노력한다. ▶남윤호= 정부가 벤처기업 육성 방안을 내놨다. 규제 완화 등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게 있다면. ▶조정일= 만약 인터넷 사업이 면허제였으면 NHN.다음 같은 기업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창의적으로 도전한 기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이란 무한경쟁의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 규제로 묶인 분야가 많다. 진입 장벽이 여전한 휴대전화 데이터 통신이 좋은 사례다. 규제가 있으면 자금력이 있는 대기업은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규제로 인해 게임의 규칙이 왜곡되는 것이다. 공공기업 정보기술(IT) 프로젝트의 경우 규모가 20억원만 넘어도 중소기업엔 안 주는 것도 공정하지 못하다. 돈을 나눠주는 정책보다는 창의적 도전이 가능하도록 공정한 게임 규칙을 만드는 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박용석= 어차피 기업은 좋은 제품을 싸게 팔아 많은 이익을 남기는 조직이다. 그러려면 굳이 한국에서 창업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규제가 많다고 불평할 게 아니라 아예 규제가 적은 다른 나라에서 창업하는 게 낫다는 얘기다. 조금만 도와주면 성장할 수 있는데 그게 잘 안 되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조정일= 창업지원자금 등 우리나라엔 창업과 관련한 좋은 제도가 많다. 그러나 창업 이후 10년 20년 기업가 정신을 가지고 사업을 일궈가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성장정책을 좀 더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김철영= 이명박 대통령이 '벤처 2기'를 선언하고 벤처기업에 성장동력을 다시 심어주겠다는 것은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지난 정부의 벤처정책은 후퇴했다. 그런 부작용 때문에 벤처창업도 줄어든 것이다. 새로운 벤처기업이 많이 생겨나도록 꿈을 갖게끔 해주는 게 중요하다. 다만 시작은 잘했는데 그걸 살리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는 벤처기업을 많이 봤다. 성장 단계에서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정책이 뒷받침된다면 한국의 벤처산업은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이다. ▶이재일= 딜로이트가 세계적인 성장기업을 선정하는 '글로벌 패스트 500'이란 게 있다. 예전엔 한국 기업들이 상위권에 많이 올랐지만 지금은 중국.인도 기업이 더 많다. 정부는 창업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성장 단계에 있는 기업에 힘을 실어줘야만 벤처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박용석= 일정 단계에 오른 벤처기업들이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고 이를 지원해주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다. 우리 같은 기업들은 누구보다 그런 아이템을 발굴하는 데 전문가 아니겠는가. 다만 그런 여력이 크지 않다는 게 아쉽다. 특별취재팀

2010-04-23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15] 아바코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LCD에 막 입히는 장비 한국산화 고객사 투자 따라 실적 오락가락 새 먹거리로 태양전지 장비 개발 "성장 하려면 인재밖에 없어" 과장급 이상에 60만주 스톡옵션" 기술에 성공하고 판매에 좌절했다. 액정디스플레이(LCD) 생산장비 메이커 아바코가 2006년 하반기 처했던 상황이 그랬다. 대구에 본사를 둔 아바코는 2000년 1월 대명ENG의 진공사업 부문이 분리해 설립됐다. 회사 이름은 첨단 진공장비를 만드는 회사라는 뜻의 영어 머리글자(Advanced VAcuum & Clean equipment Optimizer)를 따서 만들었다. 초기엔 LCD 생산용 물류 장비를 주로 만들었다. 한국 업체의 LCD 생산이 증가하고 장비 주문이 늘면서 매출도 빠르게 늘었다. 창립 4년 만인 2004년엔 매출액 500억원을 달성했다. 2005년엔 코스닥 시장에도 상장했다. 아바코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핵심 장비인 스퍼터 개발에 착수했다. 스퍼터는 대형 유리기판에 얇은 막을 입히는 장치다. 높이 4m.길이 20m나 되며 대당 가격이 90억원을 넘는다. LCD 생산 라인에선 꼭 필요한 장비지만 한국 업체들은 2005년까지 미국과 일본에서 이를 전량 수입했다. 45명의 직원이 3년 동안 매달려 개발한 끝에 2006년 한국산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성공은 곧 좌절의 시작이었다. 한국산 스퍼터 1호기를 2006년 8월 납품했지만 그때부터 내리막이었다. 주고객인 LG디스플레이가 5.5세대 LCD 생산을 위한 설비 투자를 취소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매출이 줄었고 개발 비용이 급증하면서 그해 48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2007년엔 매출액이 2005년의 반 토막이 나면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LCD 생산업체의 설비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일감을 딸 수 없는 취약한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성득기(55) 사장이 대표이사로 부임한 게 바로 이때였다. 한양대 공대를 나와 LG전자에서 엔지니어로 20여 년간 근무했던 그는 2000년 아바코의 창립 멤버로 초대 대표이사를 지냈다. 2003년 관계회사인 아바텍(글래스 코팅회사) 대표로 옮겨 근무하다 아바코가 위기를 맞자 구원투수로 나섰다. 성 사장은 취임 후 직원을 모아 놓고 "회사가 많이 성장했고 기술도 축적했지만 전리품이 없다"며 "열심히 일했지만 나눠줄 것은 없는 상처 뿐인 영광"이라고 분발을 촉구했다. 혹독한 구조조정이 이어졌다. 2005년 240명이던 직원을 2007년엔 130명으로 줄였다. 연구개발과 설계 등 핵심 역량을 최대한 보존하되 나머지 분야는 아웃소싱을 하기로 했다. "함께 일한 직원을 내보내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살기 위해선 최대한 가벼운 몸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지요." 2008년엔 LG디스플레이가 LCD 생산을 위한 투자를 늘리면서 회사 매출도 회복됐다. 2007년 257억원이었던 매출액이 2008년엔 909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2009년엔 매출액 1200억원을 달성했다. 2008년 5월엔 LG디스플레이가 아바코의 유상증자에 참여하면서 2대 주주(19.9%)가 됐다. 성 사장은 "투자를 통해 LG디스플레이와의 협력과 유대를 강화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회사의 문제점은 여전했다. 스퍼터의 개발과 판매에서 드러났듯이 LCD 경기의 흐름에 회사의 운명이 왔다갔다한다는 것이다. 경영 안정성이 약하다는 뜻이다. 이게 성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에겐 큰 고민거리였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아야 했다. 성 사장은 기존 LCD 장비 제작 경험을 살려 박막형 태양전지 장비 사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LCD와 박막형 태양전지는 제품의 성격은 다르지만 얇은 막을 입히는 제조 공정은 같다. 아바코는 LCD용 스퍼터를 한국산화한 경험을 살려 2007년 태양전지 생산 공정에서 얇은 막을 입히는 스퍼터를 개발했다. 지난해 10월엔 중국 기업인 티안웨이에 연구개발용 박막형 태양전지 스퍼터를 납품했다. 성 사장은 박막형 태양전지 스퍼터에 기대를 걸고 있다. 신재생에너지의 수요가 커지는 상황에서 중국 등에서 대량 투자가 일어난다면 본격적인 장비 수출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나리오를 따라 그가 꿈꾸는 목표는 세계 10대 장비 회사가 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LCD와 반도체 생산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장비 분야는 아직 뒤떨어져 있습니다. 이를 한국산화하지 않으면 한국 생산업체들이 해외 장비업체에 끌려갈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아직은 미국이나 일본 업체보다 규모는 작다. 하지만 아바코 나름대로의 강점이 있다. 성 사장은 원가 경쟁력과 신속한 서비스를 강조한다. 예컨대 아바코는 LG디스플레이 공장이 있는 파주에 3공장을 세워 LCD 생산 현장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직원들을 바로 내보내 대응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 업체와 비슷한 품질의 제품을 우리는 더 저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없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회사가 계속 성장하려면 역시 인재를 확보하고 키워야 한다. 성 사장은 "대기업은 조직력으로 활동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직원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야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론 큰 장벽이 있다. 지방에 본사를 둔 탓에 필요한 인재를 바로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 사장은 직원들을 키우는 데 공을 많이 들인다. 신입사원을 채용해 회사 문화에 맞게 가꿔 가자는 것이다. 아바코 전체 직원의 60%가 5년 이상 근무하고 있다. 회사 규모는 작지만 보상은 철저한 편이다. 현재 300명의 직원 중 과장급 이상 90명에게 총 60만 주의 스톡옵션(주식매입선택권)을 부여했다. 성 사장은 "일한 만큼 보상하고 직원들이 자부심과 재미를 느끼는 직장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2010-04-16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14] 동국S&C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동국산업 철구조물 사업서 분사 한국선 살 길 없어 무조건 해외로 설비도 없이 도면만으로 첫 수주 "진솔해야만 고객의 신뢰를 얻어" 캐나다에 현지공장 세워 제2도약 진솔함. 정학근(59) 동국S&C 사장이 꼽는 경영자의 최대 덕목이다. "거짓말.눈속임으로 순간은 모면할 수 있지만 결국은 일을 망치게 된다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진솔해야만 고객의 신뢰를 얻을 수 있죠." 그런 그가 2001년 금방 틀통 날 거짓말을 했다. 정 사장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일종의 사기를 쳤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게 회사의 성장 기폭제가 됐다. 2001년 초 미국 최대의 전력업체 FPLE는 발전기와 프로펠러를 지탱하는 풍력발전용 윈드타워 납품업체를 찾다가 우연히 동국S&C를 알게 됐다. 미국 풍력발전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놓은 동국S&C의 윈드타워 사업소개서를 FPLE가 본 것이다. 그러나 사업소개서는 사실과 차이가 있었다. 당시 동국S&C가 가지고 있었던 건 동국산업 시절의 철구조물 사업 노하우와 윈드타워를 만들어 보겠다는 의욕 뿐이었다. 관련 설비도 제작 경험도 없었다. "FPLE 측이 윈드타워 50기를 만들 수 있겠느냐고 재차 확인하더니 공장 실사를 요구했습니다. 당황했지만 무턱대고 '오라'고 했습니다." 정 사장은 제작 공정을 도면화해 자신의 방 한쪽 벽에 붙였다. 주문을 달라는 일종의 시위였다. "석회가루로 선을 그어 구획을 나눈 공장을 둘러보며 '여기는 용접기를 놓을 자리 여기는 절단기를 놓을 자리' 식으로 설명하니 FPLE 실사팀이 기절초풍을 하더군요." FPLE도 쫓기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해 12월까지 윈드타워를 납품받지 못하면 풍력발전 프로젝트를 놓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동국S&C의 의욕과 빠른 의사 결정에 마음이 동한 FPLE가 조건부 제안을 내놨다. 12월까지 50기의 윈드타워 전량을 납품하지 못하면 프로젝트 취소에 따른 손실 전액을 동국S&C가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이 잘못되면 동국S&C는 물론 모회사인 동국산업도 풍비박산이 날 수 있는 조건이었죠. 며칠간 수많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 '한번 해 보자'며 덤벼들었습니다." 긴장과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이틀이 채 안 걸리지만 첫 윈드타워 제작엔 한 달이 소요됐다. 그러나 결국 해냈다. 철구조물 제작 노하우 덕분이었다. 게다가 덤까지 생겼다. 여러 제품을 비교 평가한 FPLE가 동국S&C를 다른 업체에 소개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FPLE가 발전기 제조업체인 베스타스(덴마크)에 베스타스가 GE(미국)에 동국S&C를 소개하는 식이었다. 동국S&C의 수출액은 2004년 1000만 달러를 넘기더니 2007년 1억 달러 지난해엔 2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젠 세계 시장 6% 미국 시장 14%의 점유율을 가진 세계 '넘버 원' 윈드타워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이 같은 고속성장은 입소문도 큰 역할을 했지만 탄탄한 기술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풍력발전에 사용되는 윈드타워는 높이 80m. 그 큰 키로 적어도 20년간 200t 가량의 발전기와 프로펠러를 지탱해야 한다. 보통 기술로는 될 일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에서 강풍과 지진으로 풍력발전기가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동국S&C의 윈드타워는 늘 무사했다. 성공 스토리를 써 가고 있지만 정 사장에겐 가슴 아픈 얘기가 있다. 동국S&C는 2001년 동국산업의 철구조물.건설.엔지니어링 사업 부문이 분할돼 설립된 회사다. 회사가 좋아 분할된 게 아니었다. 초창기 얘기를 꺼내자 정 사장은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눈가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철구조물 등 3개 부문의 적자가 연간 70억원에 달했습니다. 동국산업이 살기 위해선 회사를 쪼갤 수 밖에 없었지요." 동상에 걸린 손가락을 잘라 내는 식이었다. 그렇게 떨어져 나온 회사의 정규직은 당시 정 사장을 포함해 16명 뿐. 새로운 살길을 찾지 못한다면 폐업도 불가피했다. "한국에선 돌파구가 없어 해외로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디다가 무엇을 팔아야 할지 전혀 감이 없었죠." 정 사장은 직원 5명을 미국으로 보냈다. "우리가 팔 수 있는 게 뭔지를 찾으려고 직원들이 LA 롱비치항에서 미국으로 수입돼 오는 물건을 며칠이고 지켜봤습니다. 그러던 중 윈드타워라는 게 야적장에 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이템 같다는 직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풍력'이란 단어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들리더군요." 윈드타워 사업은 그렇게 시작돼 FPLE와의 인연으로 연결됐다. 첫 수주를 따내기 위해 비록 선의의 거짓말을 했지만 거래처와의 약속은 철저히 지켰다. 이게 믿음을 샀다. 에피소드 하나. 정 사장은 2006년의 원화가치를 달러당 1250원으로 잡고 사업계획을 짰다. GE의 주문도 그 가격에서 정해졌다. 그런데 원화가치가 달러당 900원대로 오르자 문제가 커졌다. 그는 GE 본사로 날아가 "단가를 올려 주지 않으면 우리가 먼저 쓰러질 수 밖에 없다"고 사정했다. GE가 이를 받아들였다. 수십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흔쾌히 올려 줬다. GE 역사상 이미 체결된 계약 가격을 올린 건 처음이었다. 세계 1위 윈드타워 제조업체가 됐지만 정 사장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시작'이란 거대한 해외 시장을 가리킨다. 북미 시장을 겨냥해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현지 공장을 곧 설립한다. 중국 시장도 열어 볼 참이다. 육상 풍력이 한계에 부딪힐 것에 대비해 해상 풍력에도 도전장을 냈다. 후보 선수 16명으로 출발한 '공포의 외인구단'이 또 한번 일을 벌일 태세다. 특별취재팀

2010-04-09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13] 케이비테크놀러지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서울 여의도의 케이비테크놀러지(KEBT)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절차가 공항 검색대 통과보다 더 까다롭다. 먼저 신분증을 제출하고 지문인식기에 지문을 등록한다. 바깥 문과 안쪽 문 사이 밀폐된 공간을 지날 때는 미리 적어 낸 몸무게와 일치하는지 검사를 받는다. 신분 확인 없이 묻어가는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안쪽 문에선 또 지문 체크. 바깥 출입구에서 등록한 지문과 일치하는지 확인돼야 열린다. 한 명이 들고 나는 데 1분씩 걸린다. 70여 명 직원의 출퇴근 시간에는 줄이 길어진다. 엄격한 출입 통제 시스템은 이 회사가 스마트카드 칩 운영체제(OS)를 개발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정일(47) 사장은 "OS 개발 과정이나 설계가 외부로 새나가면 해킹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조폐공사 못지않은 보안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분야의 국제 인증기관들은 사무실 출입 관리부터 제품 성능까지 세밀한 기준을 세워 놓고 있다. 스마트카드는 집적회로(IC) 칩을 부착해 대용량 정보를 담을 수 있는 전자식 카드. 신용카드나 교통카드에 박혀 있는 손톱만 한 크기의 금색 칩이 그것이다. IC칩은 정보 저장용량이 크고 보안성이 높아 마그네틱 선을 대체하고 있다. 최근에는 휴대전화의 범용가입자 인증모듈(USIM)로 영역을 넓혔다. 전자여권.전자주민증.의료보험증에도 들어간다. 스마트카드 칩 OS의 핵심 기술은 보안성이다. 금융거래에 쓰이고 개인 정보를 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 개발한 프로그램이 국제 인증을 받기 위해선 꼭 해킹을 견뎌내는지 보안 테스트를 거친다. 해커들이 공격을 시도해 방어망이 뚫리면 퇴짜다. KEBT는 직접 개발한 스마트카드OS 70여개에 대해 국제 인증을 받았다. 한국 기업 중 국제인증을 가장 많이 갖고 있다. 한국 시장 점유율도 1위. IC칩이 들어간 신용카드 10장 중 7장에 이 회사의 기술이 녹아 있다. 스마트카드 사업 시작 후 3년 만이다. 성공은 아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성균관대 물리학과 80학번인 조 사장은 대학 때부터 컴퓨터를 접한 정보기술(IT) 1.5세대. 대우통신.한국정보통신 등에서 경력을 쌓은 뒤 1998년 창업했다. 처음엔 부산에서 교통카드 사업을 시작해 전국으로 넓혀 갔다. 시내 버스에 카드 단말기를 달고 선불 교통카드로 요금을 결제하는 시스템이었다. 소액을 결제할 수 있는 전자화폐 사업도 곁들였다. 사업 초기에는 교통카드 시스템을 설치하는 대로 돈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지보수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고 수익은 한계에 봉착했다. 해외 진출도 시도해 봤으나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 서울시가 교통카드 시스템을 도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회다 싶어 대기업과 컨소시엄을 결성해 입찰에 들어갔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 그 뒤로 경영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영업이익이 2002년 79억원에서 다음 해 7억8000만원으로 10분의 1로 줄었다. 조 사장은 기존 사업을 살리는 대신 접는 길을 택했다. 교통카드 사업을 매각했다. 내다 팔 수 있는 건 모두 내다 팔면서 과감히 정리했다. "붙잡고 있어 봤자 생명을 연장할 뿐이지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은 이미 없었지요." 당장 먹고살 거리도 없는 상황이 됐다. 그래도 다시 성장동력을 찾기 시작했다. 버는 건 없이 돈을 쓰기만 하니 2005년엔 185억원의 적자가 났다. 컨설팅 회사의 도움을 받아 회사의 역량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신사업 선정 기준은 글로벌화에 적합하고 기업이 10~20년 영속 가능하며 진입 장벽이 있는 분야로 좁혔다. 여기에 딱 맞는 게 스마트카드 OS였다. 국제 규격에 맞춘 국제 인증을 통해 사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초기 진입장벽은 높지만 그 이후엔 안정적인 성장이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교통카드 사업으로 쓴맛을 안 봤다면 새로운 도전 기회를 찾지 못했을 거예요. 미련을 갖고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게 행운이 됐죠." KEBT는 한국 스마트카드 시장을 평정한 뒤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해외에 60여개 영업 채널을 구축해 해외 마케팅을 강화했다. 지금은 해외 매출이 절반(45%)에 이를 만큼 기반을 닦았지만 처음엔 낮은 브랜드 인지도가 걸림돌이었다. "글로벌 기업들에 비해 브랜드 인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제품의 안정성이나 성능을 알리는 게 어려웠어요. 부족한 부분은 기술력과 순발력 가격 경쟁력으로 채웠죠." 기술자 출신인 조 사장이 직접 해외에서 뛴 게 먹혀 들었다. "상담 중에 고객이 '이런 것도 가능하냐'고 물어오면 바로 서울에 개발을 지시했어요. 며칠 뒤 샘플을 가져가면 고객이 깜짝 놀라죠. 몸집이 큰 대기업들은 이렇게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거든요." 그렇게 하나 둘씩 고객이 생겨났다. 기술도 알고 딜도 할 줄 아는 조 사장을 찾는 이가 많아졌다. 2007년 17억원에 불과했던 금융 부문 해외 매출은 1년 만에 89억원으로 4배 늘었다. 지난해는 전년보다 세 배 가까이로(248억원) 늘었다. 일년의 3분의 2를 해외에 머물며 뛴 결과다. 2008년엔 200억원 규모의 태국 전자주민증 사업을 따냈다. 올해에는 인도.아프리카.중동 등을 공략할 계획이다. 조 사장에게 남은 도전은 글로벌 플레이어로 도약하는 것. 현재 스마트카드의 종주국인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과 미국 회사 4곳이 세계 시장의 70~80%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과점구조를 뚫고 2013년 글로벌 빅5로 올라서는 게 목표다. 4년 뒤 매출액 5000억원이 되면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외에서 쌓은 인맥을 활용해 사업을 확대하고 해외 기업의 인수합병(M&A)을 통해 목표를 이룰 계획이다. 특별취재팀

2010-04-02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12] 미래나노텍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세계 시장을 독점하는 기업이 있다. 특허 기술 덕분이다. 시장 규모도 크다. 당연히 이익도 많이 낸다. 직원은 수만명 제품군은 8만개쯤 되는 글로벌 대기업이다. 좀처럼 움직일 것 같지 않은 '바위'다. 막 창업한 회사가 있다. 서울 봉천동 창업보육센터에 둥지를 틀었다. 사장 포함해 직원 8명. 사장이 전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과 적금을 털고 장인 돈까지 빌려 3억원으로 차린 회사다. 병아리도 아직 못 된 '계란'이다. 그런데 이 회사의 사업 아이템 글로벌 기업이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바로 그 제품으로 정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글로벌 대기업은 미국의 3M 신생 회사는 미래나노텍 그 제품은 프리즘필름이다. 2002년 김철영(45) 사장이 미래나노텍을 창업할 당시 3M은 세계 프리즘필름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프리즘필름은 LCD 패널에 들어가는 부품. 화면의 밝기를 유지하면서 소비전력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3M에 한국 굴지의 대기업들이 도전장을 냈다가 좌절을 맛본 터였다. 3M의 기술 특허는 필름 표면을 삼각형 모양의 돌기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이 특허를 피하기 위해 삼각형 모양을 포기하면 빛을 제대로 모으지 못했다. 모두 불가능을 얘기할 때 김 사장은 "그래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시장 크지 수요 늘지 돈이 확실히 되겠더라고요.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3M 특허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든든한 백이 되겠다 생각했죠. 그 장벽이 나도 막았지만 다른 경쟁자도 막아줄 수 있거든요." 그는 카메라 렌즈의 원리에 착안해 돌기를 반구형으로 만들었다. 삼성SDI에 근무하면서 광학 분야를 다룬 경험을 살렸다. 3M 특허를 피하면서 프리즘 역할도 해냈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3M보다 더 싼값에 내놓지 않으면 팔리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소프트 몰드 공법'을 개발했다. 필름에 패턴을 새겨 넣을 때 금속이 아닌 플라스틱 재질을 썼다. 금속 몰드보다 원가를 50분의 1로 낮출 수 있었다. 기술이 완비되자 이번엔 제품을 생산할 길이 막연했다. 여러 기업을 찾아 다닌 끝에 LG전자와 기술제휴를 할 수 있었다. LG의 생산시설로 제품을 만들어 바로 LG디스플레이에 납품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창업 2년 만이었다. 이듬해에는 빛을 분산하는 확산 필름과 모아주는 프리즘필름을 합친 '복합 필름'을 개발했다. 세계 최초였다. 주문이 밀려들었다. 자체 공장도 짓고 삼성전자에 납품도 시작했다. 매출이 153억원(2005년)에서 629억원(2006년)으로 1년 만에 네 배로 뛰었다. 주문량은 폭주하는데 사람이 모자랐다. 1년간 직원이 100명이나 새로 들어왔다. 그러나 달콤함도 잠시 역시 문제가 생겨났다. "사람을 뽑고 교육할 틈도 없이 현장에 배치했어요. 생산관리나 인력관리가 될 수가 없었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들의 시장 진입을 막아주던 3M 특허가 만료됐다. 그동안 실패했던 대기업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장에 제품을 쏟아냈다. 미래나노텍을 견제하기 위한 '백지 견적'까지 나왔다. 미래나노텍보다 무조건 1원이라도 싸게 납품하겠다는 회사가 줄을 이었다. 2007년 영업이익은 전해보다 63%나 줄어들었다. 본격적인 어려움은 상장 이후에 찾아왔다. 2007년 10월 공모가 3만7000원에 상장한 주식은 1년 만에 9분의 1 수준(4100원)으로 떨어졌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위기 의식으로 무장했다. "우리는 아이디어와 기술 밖에 없다. 다시 제품으로 승부하자." 보호필름을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복합 멀티 필름'을 내놓았다. TV와 노트북.모니터가 슬림화 경쟁을 하던 터라 반응이 좋았다. 서너 장씩 쓰던 필름을 한 장으로 줄일 수 있어 원가도 절감하고 두께도 얇게 만들 수 있었다. LED TV 출시에 맞춰 열에 잘 견디는 필름을 내놓아 지난해 대박을 냈다. 거래처도 해외로 넓혔다. 일본 샤프 대만 AUO.CMO 중국 BOE 등 세계 메이저 업체들을 뚫었다. 창업 8년째인 지난해 매출액은 2700억원. 연평균 복합성장률(CAGR) 231%로 제조업에서는 경이로운 기록이다. 딜로이트와 중앙일보가 선정한 이노패스트 15개 기업 중에서도 단연 최고다. 프리즘필름에선 올 상반기 세계 시장 점유율 2위(18.4%)에 올랐다. 100%였던 3M의 점유율은 22.4%로 쪼그라들었다. 김 사장은 "내년에는 3M을 제치고 세계 1위(30%)에 오를 수 있다"고 자신했다. LCD 패널의 대형화 LED 같은 신소재 개발 터치 패널용 소재 등 일찌감치 준비해 놓은 '병기'들이 있기에 나오는 자신감이다. 또 다른 난공불락 요새에도 도전장을 내놓은 상태다. 이번에도 3M이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품목이다. 혁신적 제품을 기반으로 김 사장은 과감한 목표를 내걸었다. '올해 매출 5000억원 2012년 1조원'. 2년 만에 매출을 '더블'로 만들어 조 단위로 올려놓겠다는 거다. 창업한 지 불과 10년 만의 도전이다 특별취재팀

2010-03-26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11] LCD 세정장비회사 'DMS'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착한 기업'. 회사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뭐냐는 질문에 박용석(51) DMS 사장은 뜻밖의 형용사를 사용했다. 뭐가 '착한 기업'일까.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한국 기업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고 직원들에겐 열정과 창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회사가 '착한 기업' 아닐까요." 이런 감성적인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건 역시 지표가 탄탄하게 받쳐주기 때문이다. DMS의 2008년 매출액(2794억원)은 전년(883억원)의 3.16배로 늘었다. 딱 한 해 좋다 만 것이 아니다. 5년간을 평균해 보면 연간 매출액 성장률이 13.1%에 달한다. 수익성 지표인 자기자본이익률(ROE)은 2008년 16.1%. 이 또한 전 산업 평균(5.42%)을 크게 앞선다. '착한' 경영지표가 나온 건 역시 혁신에 성공한 덕분이다. 그런데 DMS의 혁신 끌로 파거나 '맨땅에 헤딩'을 해 이룬 게 아니다. '콜럼버스의 달걀' 즉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다. 이 회사의 주력 장비인 LCD 세정장비를 보자. 유리판의 미세먼지와 불순물을 닦아내는 LCD 공정의 필수품이다. 세정력을 높이기 위해선 물탱크가 커야 하고 물을 강하게 뿌려줄 펌프도 필요하다. 이게 기존 세정장비의 컨셉트였다. 그러나 박 사장은 발상을 뒤집었다. 좁은 관을 통과하면서 압력이 높아진 공기가 물을 세차게 밀어내는 원리를 활용해 물탱크와 펌프를 없앴다. 또 살수→솔질→살수→자외선 클리닝→건조에 이르는 세정공정을 별도의 장치가 각각 처리하는 기존 세정장비와 달리 하나의 장치가 전 공정을 처리하게 했다. 대신 1층 구조였던 장비를 2층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DMS의 고집적 세정장비(HDC)의 바닥면적은 기존 장비의 3분의 1로 줄었다. LCD 제조업체는 고가의 클린룸 면적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DMS의 세정장비는 LCD의 생산효율을 5% 이상 높여줬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발상을 바꾸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일본 업체들이 유사 제품을 만들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DMS는 이 장비에만 150여건의 특허를 출원해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았다. DMS는 이 분야에서 전 세계 시장의 60%를 석권하며 2005년부터 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크기를 줄인다'는 발상은 DMS가 새롭게 진출한 반도체 장비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DMS가 최근 삼성전자로부터 수주한 건식 식각장비(dry etcher)는 구조 변경을 통해 연간 유지 비용을 수입품의 8분의 1 수준으로 낮췄다. 박 사장은 "전 세계 반도체 건식 식각장비 시장은 5조원 규모인데 향후 DMS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발상의 전환은 태양광 사업에도 빛을 발했다. 건물 옥상에 태양전지 장비를 설치하려면 바닥에 파일을 박아야 했다.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콘크리트 양생 작업을 해야 하므로 공사 기간이 길어지고 비용도 많이 든다. 옥상 바닥에 금이 가는 바람에 비가 오면 물이 샐 위험도 있다. 박 사장의 고민이 시작됐다. 그러곤 결국 답을 찾았다. 발상을 바꿔서. "굳이 바닥에 구멍을 뚫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모듈을 고정시킬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철로 건설에 사용되는 폐침목을 떠올렸습니다. 버려지는 무거운 폐침목을 활용하니 바닥에 구멍을 뚫지 않고도 모듈을 튼튼하게 고정시킬 수 있었지요." 물론 DMS의 혁신이 모두 박 사장 혼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건 아니다. 현장을 잘 아는 직원들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의 산물이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서로 얼굴을 맞대고 토론하다 보면 가닥이 잡힐 때가 많습니다." 요즘 박 사장이 붙잡고 있는 화두는 '녹색'이다. 박 사장은 머리 감을 때 샴푸를 쓰지 않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세정제를 쓰지 않고 식기를 닦는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자연의 원리를 가르치는 생물.물리 등 자연과학을 좋아했는데 그 과정에서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꽤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게 생활 습관을 바꾸기도 했고요. 마음속에 녹색당을 만들어 놓고 제가 당수 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도 많지요." '녹색당 당수'의 구상은 사업으로 착착 전환되고 있다. 자회사인 에스엔티가 2008년 12월 웨이퍼를 가공해 태양전지를 만드는 장비에 대한 국책과제 주관기업으로 선정돼 3년간 총 사업비 288억원 규모의 과제를 진행하고 있다. 유리로 만드는 박막형 태양전지 장비는 이미 개발을 완료해 해외에 납품하고 있다. 원래 태양전지는 박 사장의 주 전공이었다. 1984년 LG전자(당시 금성사)에 입사해 처음 맡았던 일이 태양전지 관련 국책과제였다. 오일쇼크 때문에 태양광 열풍이 불던 때였다. 그러나 개발 사업이 큰 소득 없이 끝나면서 그는 기본 개념이 유사한 LCD 사업을 맡게 됐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99년 LCD 세정장비를 주력으로 한 DMS를 창업했다. 태양광과 함께 몇 년 전부터 그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풍력발전기다. 효율 면에선 태양광보다 풍력이 낫기 때문이란다. 그는 "아직 연구 단계이긴 하지만 풍력발전기 시장에서 세계 유수 기업과 겨뤄보고 싶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2010-03-19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10] 에스에너지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꿈의 산업' '미래산업'. 요즘 태양광 산업 그렇게 불린다. 그런데 1980년대 초에도 그랬다. 오일쇼크로 뒤숭숭하던 때였다. 홍성민(49) 사장이 26년 전 처음 태양광과 인연을 맺은 건 그런 분위기에서였다. 하지만 꿈은 여전히 꿈에 불과했고 미래는 영 오지 않을 듯했다. 경제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라 정부 정책의 영향을 많이 받고 그에 따라 실적도 들쭉날쭉하다. 돈 안 되는 사업이라고 설움도 많이 겪었다. 그는 "비전이 아니라 오기로 버틴 세월"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 '주역'이 풀어놓는 변화의 이치이기도 하다. 그는 26년간 태양광만을 궁리하고 파고들었다. 숱한 고비 속에서 스스로를 변화시켰고 결국 세계 시장과 통했다. 그리고 이제는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을 튼튼한 기업을 만들고 싶어 한다. #궁하면 변한다 "내 운도 결국 여기까지인가…." 지난해 초 홍 사장은 해외로부터 날아든 e-메일을 보다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2008년 태양광 모듈을 사간 독일 바이어가 보낸 것이었다. 제품을 설치하고 막상 전력을 생산해보니 출력이 해외 경쟁사 제품보다 15%나 적게 나왔다는 것이다. 보상을 요구하는 문구도 덧붙었다. 사정이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간 제품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사업을 접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민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외화를 한 푼이라도 벌어 환손실을 메워야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나간 해외시장이었다. 일단 판매는 원활했다. 우선 해외 유명사 제품에 비해 가격경쟁력에서 앞섰다. 또 대규모 유통망 대신 설치업자들을 직접 공략해간 전략이 주효했다. 한 명이라도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았다. "해외 유명업체들은 10㎿ 정도는 주문해야 물건을 내줬는데 우리는 100㎾짜리 주문도 달게 받았습니다." 생존을 위해 한 명의 고객이라도 더 끌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준비가 다소 부족했고 홍 사장도 그 문제가 늘 마음에 걸렸던 차였다. 그는 "서두른 탓에 해외 경쟁사 제품에 비해 어느 정도 수준인지도 파악이 안 돼 있었다"고 말했다. 태양광 모듈은 품질을 속일 수 없는 제품이다. 일단 설치되면 전력이 얼마나 생산되는지 금방 수치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변하면 통한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홍 사장은 직원들을 독일로 급파했다. 현지에 도착한 직원들은 설치된 제품을 하나하나 뜯어냈다. 그러자 설치와 배선 연결이 잘못된 점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시스템을 연결했다. 놀랍게도 출력이 경쟁사 제품을 넘어섰다. 바이어의 태도도 확 달라졌다. 보상 협의를 하러 갔던 직원들이 추가 주문까지 받아 왔다. 반전은 계속 이어졌다. 지난 겨울 유럽 지역에는 유난히 폭설이 잦았다. 눈의 무게를 못 이겨 태양전지 패널이 줄줄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에스에너지 제품은 버텼다. 확연히 드러난 내구 품질에 현지에서 호평이 쏟아졌다. 내구성에 초점을 맞춘 탓에 "제품 디자인이 중국 것보다 투박해 보인다"는 불평이 빈번해 홍 사장의 고민이 늘던 차였다. 여기에 이르는 길은 결코 순탄치가 않았다. 태양광 사업에 뛰어든 이후 홍 사장에겐 말 그대로 매일매일이 위기였다. 그는 전기공학 석사를 딴 뒤 1983년 삼성전자 연구소에 입사해 태양광 연구를 시작했다. 1992년 가전사업부 내 사업팀이 출범했고 투자가 시작됐다. 문제는 시장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는 점이다. 도서지역의 등대 고속도로변의 긴급전화기나 통신용 중계기에 달리는 게 고작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환위기가 닥쳤다. 비핵심 분야는 분사하는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돈 못 버는 태양광이 1호로 지목됐다. 그렇게 2001년 홍 사장을 포함해 네 명이 나와 설립한 게 지금의 에스에너지다. 2006년 이후 태양광 열풍이 분 덕분에 현재 직원 수는 242명에 달한다. 지난해 금융위기의 여파로 태양광발전 시장은 전년보다 5% 이상 위축됐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하지만 에스에너지는 오히려 매출이 전년보다 40% 가까이 늘며 가파른 성장세를 타고 있다. #통하면 오래 간다 매출은 오르는 반면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홍 사장은 "조급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태양광을 하면서 그가 꾸는 꿈은 고성장이 아니라 '100년 회사'다. 대기업들까지 태양광에 뛰어드는 상황이라 지금껏 그랬듯이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하지만 태양광에 대한 그의 지론은 분명하고 단호하다. "태양광은 최첨단 산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이 회사는 태양전지 수백~수천 개를 합쳐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든다. 한번 설치하면 30년을 견뎌야 한다. 출력도 출력이지만 내구성도 중요하다. 그는 "우리 회사의 최대 자산도 첨단기술이 아니라 17년간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통해 깨달은 노하우"라고 했다. 그는 직원을 뽑을 때도 지방 출신을 선호한다. 대학도 가리지 않는다. 사업의 성격상 위기를 헤쳐가는 자생력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끈기를 중시하기 때문이란다. 독일에 갔던 직원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렸던 것도 그런 오기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일단 해보고 생각하자." 그가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이다. 그런 그에게 요즘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급속한 성장에 맞게 회사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갑자기 몸무게가 두 배로 느는 거니 가만있으면 병이 안 생기겠어요? 매출이 100억에서 1000억으로 늘면 그에 맞게 사람도 생각도 바뀌어야 되겠죠. 나 자신부터 바꿀 겁니다." 100년 버티는 장수회사를 만들기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특별취재팀

2010-03-12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9] 아이엠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얼마인지 밝힐 순 없다고 한다. 2008년 코스닥에 상장하면서 들어온 돈 지금 다 회사 금고 안에 있단다. 인수합병(M&A)에도 썩 관심이 없다. 한국내 대기업과는 절대 경쟁하지 않겠다고 한다. 새로 진출하려는 사업에도 많은 돈을 쓸 생각이 없다. 세계 1위의 광픽업(레이저를 이용해 음성.화상.데이터를 재생하는 장치) 생산업체 아이엠 얘기다. 성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경영인데도 2008년 매출(본사 기준 756억원)은 2007년보다 14% 늘었다. 금융위기의 충격도 딱 6개월 만에 회복했다. 2009년 2분기 매출은 323억원 한 분기 만에 지난해 매출의 40%를 해냈다. 아이엠은 2006년 삼성전기에서 분사한 기업이다. 대기업 문화가 남아 있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하지만 아이엠은 톡톡 튄다고 혁신을 하는 게 아니고 요란하다고 고성장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 회사의 성장은 '3M'에서 나온다. 시장(Market)을 중시하고 관리비용은 최소(Minimum)로 막고 회사의 자금(Money) 흐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시장(Market)이 최우선 손을재(59) 사장은 삼성물산과 삼성전기에서 영업 분야에 오래 있었다. 그래서 시장 돌아가는 걸 잘 읽는다. "영업 출신은 고집이 세지 않습니다. 시장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면 물건을 팔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시장 흐름을 보고 타이밍(시기)을 잡는 데는 선수입니다." 그는 기술 외곬에 빠지지 않는다. "기술도 변하고 시장도 변한다"며 유연하게 본다. "시장의 수요를 무시한 채 '세계 최고 기술인데 알아주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기업을 보면 안타깝지요." 그의 시장 중시 경영은 사업 아이템을 고르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삼성전기가 여러 사업 부문을 분사시키던 2005년 그는 다른 사람이 맡으려던 광픽업을 낚아챘다. "시장의 구조가 단순했습니다. 대만 업체는 없고 일본 업체 두세 곳만 있었지요. 게다가 소니와 산요는 AV용 광픽업을 축소하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분사하면서 삼성전기 중국 공장의 직원들을 데리고 나왔다. 중국이 최대의 시장이기 때문에 중국을 잡지 못하면 승부를 낼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 회사는 중국.홍콩에 3개의 별도 법인이 있다. 그는 "베트남이나 동유럽엔 중국만 한 시장이 없다. '마켓 인(Market-In)'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해외 법인 매출을 합하면 이 회사는 지난해 3500억원의 매출을 예상한다. 이 가운데 60%가 중국 시장에서 나왔다. 그는 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시장은 따로 있다고 믿는다. "대기업이 없는 시장도 많습니다. 덩치 큰 사람은 작은 골목에는 못 들어옵니다." 하지만 대기업에 목을 매지도 않는다. 회사의 매출 중 국내 대기업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40%로 줄어든 상태다. 이동현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대기업과 부품업체가 갑과 을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이엠은 핵심 기술을 바탕으로 을의 위치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최소(Minimum) 관리비용 삼성전기에 있을 때 손 사장은 대만과 납품 경쟁에서 여러 번 졌다. 아무리 가격을 낮춰도 대만보다 높았다. 관리비용 때문이었다. 좀 심한 대만 기업은 아들이 납품하고 아내가 경리 보는 식이었다. 항상 10% 정도의 가격 차이가 났다. 그래서 손 사장은 불필요한 인력은 최대한 억제한다. 분사 후 40명인 본사 직원이 80명이 됐는데 대부분 연구개발 인력이고 지원 인력은 두어 명 늘었다. 그는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은 다 과잉 인력이다. 현장에 있는 사람은 물건을 만들거나 제품을 판다"고 말했다. 최소 비용의 원칙은 새 사업 진출에도 적용된다.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사업은 올해 처음으로 10억원의 매출이 난다. 내년에는 100억원을 예상하고 있다. 이미 보유한 광학 기술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의료기기 분야 진출도 추진 중이다. 전자부품연구원(KTEI)과 원주의료클러스터 독일의 프라운호퍼 연구소와 공동 개발을 통해 전립선암 검사기 골다공증 진단기 등의 개발에 착수했다. "의료기기는 미래성장산업이면서 국책 사업이어서 정부 지원이 80%에 달합니다. 큰 줄기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신사업 투자는 이익의 2% 정도만 할 생각입니다." #자금(Money) 흐름이 최우선 해외 출장이 잦은 손 사장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점검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금 흐름표다. "재무제표상 이익보다 중요한 게 현금입니다. 이익 내고도 흑자 도산하는 업체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일 중요한 건 역시 현금이지요. 아무리 이익을 많이 내도 금고가 비어 있으면 소용없습니다." 해결할 문제도 있다. DVD 시장이 포화상태에 빠져들고 있고 고부가가치인 IT용 광픽업 시장에서 아직 일본 업체를 압도하지 못하고 있다. 손 사장은 해외법인을 합쳐 회사 매출 규모를 1조원으로 만드는 게 목표다. 아직은 뾰족한 계기를 잡지는 못하고 있다. 유능한 인재들은 중소기업에 잘 오려 하지 않고 기존 직원들은 노령화돼 가는 것도 썩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손 사장은 한 발씩 나아갈 작정이다. 특별취재팀

2010-03-05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8] 홈 네트워크 시장 선두주자 '코콤'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기술력. 잘나가는 기업들이 내세우는 성장 비결이다. 여기에 첨단이나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정작 탄탄한 기술력을 지닌 코콤의 고성욱(60) 사장 생각이 조금 다르다. "기술에 자만하는 중소기업이 의외로 많습니다. 소비자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 놓고는 '이래도 안 사느냐'는 식이죠. 그러나 시장의 흐름을 읽지 못한 제품은 아무리 첨단기술로 무장했더라도 외면받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기술을 위한 기술 그 자체보다는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춘 제품 개발과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기술을 가볍게 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고급 기술로 세계시장에서 겨뤄본 현장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코콤의 기술력은 제품 목록에서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병원 간호사 호출 시스템(1984년) 비디오 도어폰(87년) 디지털 컬러 CCTV용 카메라(94년) 디지털 스틸 카메라(96년)…. 한국 또는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술 또는 제품들이다. 그런데도 고 사장이 '기술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초장엔 기술로 톡톡히 재미를 보다 덜커덕 좌절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76년 인터폰 제조업체로 사업을 시작한 그는 처음엔 탄탄대로를 걸었다. 87년 한국 최초로 개발한 비디오 도어폰에서 절정을 맛본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누구인지 화면으로 금세 확인할 수 있었으니 목소리만 나오는 기존 도어폰에 비해 혁신적 제품이었다. 특히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린 게 결정적이었다. "90년대 중반 우리가 월 6만~7만대의 비디오 도어폰을 생산할 때 2 3위 일본 업체의 월 생산량은 1만5000여대에 불과했습니다. 코콤이 세계 비디오 도어폰 시장을 쓸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지요." 그렇게 코콤은 89년 이후 97년까지 명실상부한 세계 1위의 비디오 도어폰 메이커로 군림했다. 90년대 말엔 홈 네트워크 시장으로 진출했다. 이것도 성공 스토리의 일부다. 홈 네트워크는 가정의 자동화 기기에 통신.소프트웨어 기술을 결합한 것이다. 코콤은 홈 네트워크란 단어가 낯설었던 98년 이 시스템을 신축 아파트에 설치했다. 시장을 선점한 것이다. 먹구름은 그 언저리에서 몰려 왔다. 90년대 중반부터 대기업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후발사들과의 기술 격차는 점점 좁혀졌다. 비디오 도어폰 시장도 성장세가 꺾이고 있었다. 이에 대응해 고 사장이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주목한 게 디지털카메라였다. 이미 카메라 시장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기울고 있던 상황이었다. 코콤은 80년대 말부터 CCTV 카메라를 만들었으니 기술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96년 자사 브랜드의 카메라를 개발했다. 한국에선 최초로 탄생한 디지털 스틸 카메라였다. 그러자 일본의 니콘이 코콤의 기술력에 주목했다. 니콘은 경쟁사에 비해 디지털로의 전환이 늦어 기술력 있는 아웃소싱 업체를 찾고 있었다. 그게 코콤이었다. 그러나 코콤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카메라 기술력보다는 마케팅에서 실패했습니다. 가전.컴퓨터 매장이 아닌 카메라 전문점을 공략한 것이 화근이었지요." 그는 "기술력만으로 시장을 헤쳐나갈 수 없다는 교훈을 그때 깨달았다"고 아쉬워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새로운 도전에 착수했다. 발광다이오드(LED) 조명과 '지능형 전력망'으로 불리는 스마트 그리드 사업이다. "이들은 홈 네트워크 기술을 기반으로 합니다. 남들이 한다고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잘할 수 있는 분야이기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5년여 전부터 LED의 시장성을 파악하고 3년 전부터는 본격적인 연구개발을 진행해 왔다. 전력 사용 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해 에너지 효율을 최적화는 스마트 그리드 사업도 그에겐 친숙한 분야다. 그린 에너지 사업에서 단꿈을 꾸고 있지만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최근의 부진한 성적이다. LED와 스마트 그리드. 여러 기업이 뛰어들고 있으니 기술력으로 승기를 잡고 마케팅으로 우세를 다져야 하는 분야다. 기술 외곬에 대한 고 사장의 반성은 비디오 도어폰 세계 1위의 성공신화를 재현하겠다는 야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별취재팀

2010-02-26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7] 에이스테크놀로지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이동통신 안테나·필터 메이커 공장 신축으로 재도약 채비중 '제품에 무한 책임' 경영 철학…고객 잘못에도 90억 무상교환 SVEA SISU. 인천 남동공단의 에이스테크놀로지 본사 6층에 있는 회의실 이름이다. 앞엣것은 스웨덴의 옛 이름이고 뒤엣것은 희망이란 뜻의 핀란드어다. 하나는 에릭슨(스웨덴) 다른 하나는 노키아지멘스(핀란드)를 위한 공간이다. 세계 1 2위 통신장비업체 사이에서의 성공적인 '양다리' 회의실 이름에서도 잘 나타난다. "기술은 물론 서비스까지 고객 눈높이에 맞춘 덕분"이라는 게 구관영(62) 회장의 설명이다. 시작은 1980년 안테나 수입업체였다. 그 뒤 카폰 안테나 메이커로 다시 이동통신 기지국용 안테나.필터 제조사로 진화했다. '세계 최고 회사를 뚫어야겠다'는 생각에 에릭슨의 문을 처음 두드린 건 95년. 2년여간 공들인 끝에 97년 100만 달러어치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에릭슨의 '전략적 파트너'로 인정 받은 지금은 에릭슨에 대한 매출이 4000만 달러에 달한다. 2006년엔 노키아지멘스와도 거래를 텄다. 지금은 두 회사에 대한 매출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변화가 빠른 통신장비 시장은 기술력 못지않게 전략적 제휴 관계가 중요하다. 구 회장은 고객회사의 기대치에 맞춰 회사를 키워갔다. 유럽과 미국에 판매지사를 뒀고 2000년엔 에릭슨의 희망대로 중국에 진출했다. 거인의 등에 올라탔던 셈이다. 기술혁신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2001년엔 안테나 신호의 손실을 줄여주는 장비인 TMA의 개발에 성공했다. 세계 TMA 시장에서 에이스테크놀로지의 점유율은 25~30%에 이른다. 성공의 바탕엔 구 회장의 고집스러운 원칙이 있다. '제품에 대한 무한책임'이 그것이다. 5년쯤 전이다. 한국 통신사에 기지국용 안테나를 납품했을 때였다. 납품액수는 100억원인데 하자가 생긴 물량이 90억원어치에 달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동통신 기술이 2세대에서 3세대로 넘어가는데 안테나를 2세대용으로 발주한 통신사의 책임이 컸다. 하지만 그는 고민 끝에 통신사에 "100% 무상 교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결과적으로 무상 교체해준 물량은 10억원어치 정도였어요. 이후 그 통신사가 시스템을 전부 3세대로 교체하면서 우리에게 거의 100% 납품권을 줬죠. 그때 '못 바꿔준다'고 버텼으면 그 주문은 딴 데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회사가 이 정도에 이르기까지 곡절이 없었을 리 없다. 90년대 말 에이스테크놀로지는 승승장구했다. PCS 서비스가 시작되고 코스닥에 상장(97년)하면서 가파르게 성장했다. 99년엔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다. 그 이듬해 구 회장은 '2010년 매출 1조원'이란 목표를 내걸었다. "10년 뒤 1조원 까짓것 못하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10년인 올해 에이스테크놀로지는 해외 공장까지 합쳐도 3000억원 정도를 예상한다. 매출은 몇 년째 정체 상태다. "목표 달성은 못하겠다"는 게 구 회장의 솔직한 답이다. "내가 왜 그렇게 겉멋이 들었던가 돌이켜보니 그때 사업에 권태기가 왔어요." 그는 2003년 전문경영인을 영입했다. 자신은 사업보다 취미와 여행에 몰두했다. 그 공백기 4~5년이 컸다. 회사는 조금씩 흔들렸다. "회사를 맡겨놓고 현장을 안 챙겼던 내 탓이었지요." 그 뒤 구 회장은 자기 손으로 키운 에이스테크놀로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안테나 중 한 품목에서만 자꾸 불량이 났다. 담당 팀에 "도대체 어떤 부품으로 구성돼 있는지 데이터를 가져오라"고 했다. 오너 회장의 지시에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큰일 났다 싶었다. 당장 부품 리스트를 하나하나 따져봤다. 직접 수입하면 될 부품을 비싼 값에 청계천에서 사오는 등 허점투성이였다. '에이스의 정신이 죽었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당장 대표.임원.부장.팀장급을 아침마다 모아놓고 '정신교육'에 들어갔다. 못하겠다는 불만이 터져나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거기서 그가 발견한 건 팀장급 중에 보석 같은 인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사급을 빼고 팀장들을 부문장에 앉혔다. 그들을 믿었기 때문이다. 전문경영인은 사표를 냈고 구 회장이 다시 경영을 직접 챙겼다. 그로부터 1년 반 회사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 2008년 적자에서 탈출했다. 아이템별로 들쭉날쭉하던 생산수율(합격품 비율)은 지난해 여름부터 안정을 찾았다. 2009년 매출은 금융위기 여파로 제자리였지만 보이지 않는 생산 시스템의 혁신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에릭슨 브랜드의 안테나를 개발하는 게 1년 반이나 지연됐어요. 내가 6개월만 먼저 들여다봤으면 지난해 500만달러는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죠." 주력 제품인 안테나.RF필터 시장엔 미국의 파워웨이브.앤드루 등 쟁쟁한 경쟁자들이 버티고 있다. 에이스보다 덩치가 몇 배 큰 회사들이다. 하지만 구 회장은 해볼 만하다고 본다. "4~5년 전엔 동경했던 회사들이지만 이젠 우리가 일사불란하게 힘을 합치면 이겨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 믿음이 내 에너지의 원천이기도 하고요." 도약을 위한 하드웨어는 갖췄다. 지난해 본사와 공장을 신축하면서 고급 기종 안테나의 성능 실험장비를 마련했다. 그동안 스웨덴 업체에서 빌려 쓰던 장비를 50억원에 직접 들여놓은 것이다. 올해엔 인도 첸나이 공장도 돌아가기 시작한다. 인도 진출 역시 에릭슨.노키아지멘스와의 파트너십이 바탕이 됐다. 인천 송도엔 연구개발센터를 짓고 있다. "자신감과 열정에 찬 직원들이 있기에 2~3년 내에 매출 1조원 벽을 넘을 겁니다." 그가 2000년에 내건 목표 무산된 게 아니라 약간 수정됐을 뿐이다. 특별취재팀

2010-02-19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6] 화우테크놀러지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대학에서 철학 전공. 졸업 후 3년간 보험회사 근무. 월급쟁이 생활을 접고 찾아든 곳이 청계천 기계 골목. 친척 공장에서 기계 고치는 것을 돕다가 창업. 유영호(50) 화우테크놀러지 사장이 기계 공장(화우기계)을 차린 것은 꼭 20년 전이다. 그러다 2000년 이후 공작기계 메이커에서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사업자로 화려한 변신이 시작된다. LED 말 그대로 스스로 빛을 내는 반도체다. 휴대전화 화면을 밝히는 데 주로 쓰인다. 최근엔 TV용 디스플레이 뒤에 들어가는 백라이트로도 쓰임새가 넓어졌다. 요즘 LED가 각광받는 건 소재의 친환경성 덕이다. 같은 전력으로 형광등이나 백열등보다 훨씬 밝은 빛을 내고 수명도 길다. 유럽에서는 수년 내에 전력 소모가 큰 백열등을 LED 조명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 "백열등은 전력의 5%만 빛으로 바꾸고 95%는 열로 소비합니다. 반면 LED 조명은 전기 에너지의 80%를 빛으로 바꾸니 에너지 효율에서 비교가 안 되죠. 에너지 절감이 각국 공통의 화두가 되면서 자연히 LED 조명에 대한 수요가 커진 거죠." 사슴 떼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길목을 지키는 포수의 전략이라고나 할까. 화우테크놀러지는 2006년 평판형 LED 조명인 '루미시트'를 2007년엔 전구형 '루미다스'를 내놓았다. 한국보다는 일본과 미국 유럽 같은 선진국에서 장사가 됐다. 전기요금이 비싸고 에너지 절약과 이산화탄소 배출 억제 같은 사회적 요구가 큰 선진국들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2008년 LED 조명 매출액 608억원 중 83%가 수출이다. '블루오션'인 LED 조명과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기계공장을 운영하면서 부닥친 장벽을 넘기 위한 끊임없는 탐구와 혁신의 결과다. 그는 화우기계를 창업한 뒤 처음엔 외국산 공작기계를 들여와 본떠서 팔았다. 그러다 자체 설계로 CNC(수치제어) 전용장비를 개발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컴퓨터로 디자인한 문양을 정교하게 깎아내는 기술로 기계를 꽤 팔았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기계에선 선진국이 우리보다 200년은 앞서 있습디다. 도저히 못 따라가겠더군요. 웬만한 건 모두 특허로 걸려 있고 브랜드도 경쟁이 안 됐어요. 한국 시장은 너무 작아 외국으로 나가야겠는데 기계로는 이길 수가 없겠더라고요." 적어도 출발선이 비슷해야 세계 무대에서 어느 정도 겨뤄볼 것 아닌가. 그래서 그는 남들이 안 하는 것을 찾았다. 그래야 앞서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그간 노하우를 쌓은 기계 사업과 영 동떨어져서도 안 됐다. 우선은 CNC조각기계를 활용해 지하철역 대형 광고판 제작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광고판 디자인을 다양하게 만들기 위해 형광등을 대신할 광원을 찾던 중 LED를 알게 됐다. 2000년이었다. LED 조명 시장의 규모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을 정도로 초기 단계였다.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분야였고 그래서 열심히 하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출발선에서 총성이 울렸는데 우리가 먼저 출발한 셈이지요." 이때부터 LED 기술 개발에 몰두했다. 다른 회사들이 20W급 제품을 들고 나왔을 때 화우는 80W급의 제품화에 성공했다. LED는 밝기를 높이면 열이 많아진다. 이 열을 다스리는 게 기술의 핵심이다. 아크릴판에 홈을 파서 LED를 5분의 1 정도만 집어넣고 나머지 5분의 4는 밖으로 드러나게 고정시킨 뒤 방열 코일을 둘러 열을 밖으로 빼내는 '방열 코일 기술'을 개발했다. 빛이 앞으로만 나가는 '직진성'을 보완하고 골고루 퍼지게 하기 위한 광유도 기술도 개발했다. 여기엔 CNC 공작기계의 정교한 커팅 기술을 응용했다. 이렇게 개발한 기술로 그는 세계 40개국에서 특허를 냈다.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을 때 한 발 앞서 연구해 먼저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오스람이나 필립스 같은 대기업들은 '제 살 깎아먹기'를 우려해 LED 조명 사업에 소극적이었다. LED 조명은 회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2004~2006년 140억원대에 머무르던 연간 매출액은 2008년엔 5배가 넘는 742억원으로 불었다. 또 2006년 7.2%였던 매출액 영업이익률도 지난해 19.3%로 뛰었다. 하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금융위기는 역풍이었다. 일본.미국.캐나다 등 해외 합작법인 추진이 뒷걸음질쳤다. 또 해외 투자자들이 투자를 미루거나 취소하는 바람에 요즘은 투자자 찾기에 다시 나섰다. 대량생산에 대비하기 위해 신축한 공장을 규모 있게 돌리는 것도 유 사장의 고민거리다. "경기 침체의 돌파구로 녹색성장이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또 나라마다 이산화탄소 감축 계획이 가시화하고 있지요. 점점 좋은 여건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기술 발전으로 LED 가격이 떨어지면 산업용에 머무르던 수요가 가정용으로도 확산할 겁니다. 곧 대량 판매할 수 있을 때가 올 겁니다." 유 사장은 '기업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 CNC공작기계에서 광고판으로 그리도 다시 LED 조명으로 신속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는 다시 진화할 채비를 하고 있다. "LED 조명 시장도 머지않아 레드오션이 되겠죠. 국내 경쟁업체만 수십 곳인 데다 장기적으로 다국적 기업과의 싸움이 되면 승산이 없다고 봐요." 그래서 또 아이디어를 짜냈다. LED조명과 이산화탄소 배출권 사업을 연계한 것이다. 대규모 사업장과 공공시설에 LED 조명을 설치하고 그로 인한 온실가스 감축량만큼을 탄소배출권으로 거래해 수익을 얻는 사업 모델이다. 정부의 청정개발체제(CDM) 사업 승인도 받았다. 그의 경영 철학 '중원을 장악해 천하를 평정한다'는 것이다. 일단 중원을 장악했으니 이젠 다음 단계로 들어설 태세다. 특별취재팀

2010-02-12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5] '정우금속공업'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경영은 이론이 아니다. 실전 그 자체다. 이광원(60) 정우금속공업 회장에겐 특히 그렇다. 그가 목숨처럼 강조하는 품질관리와 고객관리. 대학에서 배우거나 책을 읽고 하는 게 아니다. "제가 아는 건 책이 아닌 부딪히며 체험으로 배운 것입니다." 정우금속의 주력 제품은 동관 이음쇠. 동관의 방향을 바꾸거나 길이를 연장할 때 쓰이는 자재다. 1985년 그는 KS 규격을 획득했다. 동관을 만든 지 4년여 만에 품질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나 바로 문제가 생겼다. 생산한 제품이 스스로 딴 규격에 미달했다. 한 달간 쏟아져 나온 불량 이음쇠만 돈으로 따져 3개월치 직원 월급에 맞먹었다. 고민만 하다가 또 한 달이 흘렀다. 그러는 새 직원 6개월치 급여 규모의 이음쇠가 쌓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도매상이 그를 찾아왔다. 싸게 팔라는 것이었다. "정말 갈등이 많았습니다. 규격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이전까진 별 이상 없이 팔던 수준의 제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불량 제품을 팔면 그걸로 나도 회사도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해를 감수하기로 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에 걸쳐 불량품을 전량 폐기 처분했다. '이광원식 품질관리론'은 그렇게 나왔다. 지금도 회사 홈페이지엔 이런 슬로건이 나온다. '불량은 받지도 만들지도 보내지도 않는다'. 그 뒤 고뇌에 찬 결단을 해야 할 때가 또 닥쳤다. 외환위기였다. 97년 말 금속제품의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환율이 치솟은 까닭이다. 100원에 수입한 원자재 가격이 환율 효과만으로 200원이 됐던 시절이다. 미리 원자재를 사둔 업체는 굳이 서둘러 제품을 출하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반대로 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신뢰 관계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도매상 등 고정 고객들에게 제품을 공급했다. 그 덕분에 상당수 거래 회사들이 위기에서 벗어났다. 물론 그도 어려웠다. 그래도 고객들을 유지한 덕분에 98년 회사의 매출은 전년의 2.4배로 늘었다. "고객이든 경쟁자든 나만 사는 게 아니라 서로 동반자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회사 이름도 정우로 지었습니다. 시장의 위기를 이용해 이익을 챙기고 싶진 않았죠." 이게 '이광원식 고객관리론'이다. 다소 목가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실력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터득한 것이다. 200억~300억원 규모의 한국 시장만으론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이 회장은 80년대 말부터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좀처럼 길이 뚫리지 않았다. 그는 "수출만이 살길이다란 절박감 외엔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서 어디에다 팔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88년 어렵사리 일본 업체에 납품했지만 불량품이 많이 나오는 바람에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일본 회사들은 기술 이전에도 인색했다. 이탈리아의 동관 이음쇠 업체를 찾아 기술 이전과 생산 협력 등을 요청했지만 거기서도 큰 소득을 얻지 못했다. 미국 업체를 따라가려니 자동화 설비에 너무 많은 투자가 필요해 이 또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회장은 "오기가 아니었으면 그때 이미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단 베끼기로 했다. 해외에 나갈 때마다 사가지고 온 제품을 보면서 도면을 그리고 그걸 기초로 금형을 만들어 샘플을 제작했다. 속된 말로 '맨 땅에 헤딩하기'였다. 지금도 경기도 양주의 공장엔 당시 해외에서 들고 온 샘플이 수북하다. "정말 무식한 방법으로 일했지만 그 외엔 달리 길이 없었죠." 노력의 대가는 달콤했다. 동관 이음쇠의 경우 모든 국가에 공통되는 국제 규격이 없다. 이 회장은 기술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웬만한 국가의 이음쇠 규격을 다 확보하게 됐다. 바닥을 훑는 식의 기술 축적이 큰 무기가 된 것이다. 심지어 버려진 기계장비를 사다가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장비를 직접 만들 수 있는 기술력까지 갖추게 됐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우금속은 680여개의 제품 규격을 확보했다. 이를 토대로 4300여 가지의 제품을 만든다. 다품종 소량생산 시스템이 확실히 자리 잡혔다. "고객이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회사는 세계적으로 우리가 유일할 겁니다." 기술력과 생산력 이는 실적으로 나타난다. 2008년 매출액은 870억원. 2004년 이후 5년간 연평균 7.8%씩 성장했다. 이 회장은 "올해 공장을 이전하기 때문에 가동률이 60%에 머물고 있지만 2008년 수준의 실적은 나왔다"이라고 말했다. 수익성도 제조업체로선 탁월하다. 제품을 팔아 얼마를 남기느냐를 보여주는 매출액 영업이익률은 2008년 14.7% 지난해 3분기까지 17%에 달했다. 특히 3분기엔 24.7%로 1000원어치를 팔아 247원의 수익을 남긴 셈이다. 현재 정우금속의 한국 시장 점유율은 59%. 2007년 이 회장이 인수한 SMI의 몫까지 합치면 정우 계열의 점유율은 80%가 넘는다. 그래도 이 회장은 "아직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세계시장 점유율이 10% 정도로 세계 4위에 머물고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는 해외 영업망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동관 이음쇠만큼은 이미 일류라 자부하지만 동시에 1등 기업이 되도록 할 것"이라는 그는 계속 앞으로 내달릴 태세다. 특별취재팀

2010-02-05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4] 지문인식 기술업체 '슈프리마'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노패스트 15’는 혁신(Innovative)과 고성장(Fast-Growing)을 주무기로 한 혁신형 고성장 기업을 가리킵니다.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지문인식기술 업체인 슈프리마의 이재원(41.사진) 사장은 기술통이다.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를 졸업하고 전기공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경기도 분당에서 대학 동문들과 창업한 뒤 그가 겪은 가장 큰 벽은 마케팅이었다. 창업 3년 만에 지문인식 모듈을 개발하고 판로 개척에 나섰으나 번번이 좌절했다. 당시 지문인식 제품에 대한 국내 소비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벤처 붐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바이오 벤처들이 엉성한 제품을 시장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오차율이 40~50%나 되는 제품이 시장에 나돌았다. 슈프리마는 오차율을 1~2%대로 낮춘 제품을 갖고 나왔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불량품이 워낙 많다 보니 슈프리마의 제품도 도매금으로 넘어가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해외로 가자." 기술력은 자신 있었기 때문에 수출로 방향을 돌렸다. 문제는 신생 업체가 세계 무대에서 제품을 알리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이 사장은 홈페이지를 꼼꼼하게 만든 뒤 구글에 검색광고를 냈다. 검색창에 'fingerprint(지문)'를 치면 슈프리마가 가장 먼저 떴다. 해외의 선발업체들이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였다. 권위 있는 국제 지문인식 경연대회에도 출전했다. 기술력으로 승부하기 가장 좋은 기회였다. 2회 연달아 세계 1위를 차지하면서 해외 시장에서 이름을 알리고 신뢰를 쌓아갔다. 제품 판매 첫해인 2003년 매출 7억원 중 90% 이상이 수출에서 나왔다. 해외에서 성공을 거둔 뒤 국내로 진입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 사장이 지문인식에 눈뜬 건 필연적인 우연이라 할 만하다. 그는 대학원을 마친 뒤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에서 지능형 차량 시스템을 연구했다. 그러나 삼성이 자동차 사업을 접으면서 연구과제가 마땅치 않자 창업의 길을 택했다. 딱히 사업 아이템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창업 후 2년간 뭘 할까 고민하면서 기술용역을 했다. 그러다 한 고객회사가 지문인식 알고리즘 개발을 의뢰해 왔다. 이 과제를 연구하면서 이 사장은 시장성에 눈을 떴다. 센서와 영상을 통해 지문정보를 받아들여 이미 등록된 것과 같은지 수학적으로 계산해 내는 게 지문 알고리즘의 핵심이다. "그래 이거다." 수학이라면 무엇보다 자신 있었던 그였다. 회사명 슈프리마도 수학용어 '슈프리멈(100에 가장 가까운 수)'에서 따왔다. 일반적인 정보기술(IT) 사업과 달리 수학과 신호처리 이미지 프로세싱 등 여러 기술이 복합된 분야라는 게 그에겐 더 매력적이었다. 사업 경험이 없고 브랜드파워나 마케팅이 뒤지더라도 기술력으로 시장을 파고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안정적인 수입을 꼬박꼬박 가져다주던 기술용역 사업은 과감히 접었다. 기술용역만으로도 대기업 연구원 이상의 수입을 얻었지만 안주하기보다는 도전해 승부를 걸기로 했다. 지문인식기술 개발에 '올인'한 지 근 1년 만에 첫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지문인식 모듈은 디지털 도어록 출입통제기 금고 신원확인 기기 등에 활용된다. 국내에서는 보안업체 에스원에 독점 공급하고 있다. 수출 대상국은 이미 100여 개국에 이른다. 세계 판매량 1위다. 이 사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했다.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문인식 모듈과 솔루션을 결합해 완제품의 생산.판매에도 뛰어들었다. '바이오 라이트 솔로' '바이오 스테이션' 같은 브랜드로 출입통제 기기와 근태관리 기기를 내놨다. 지문인식 시스템 시장에서 슈프리마의 점유율은 58%다. 회사 출입문이 지문인식 시스템으로 바뀌었다면 둘 중 하나는 슈프리마 제품인 셈이다. 슈프리마의 사업 영역은 계속 커지고 있다. 지문이 패스워드나 열쇠를 대체하고 신분증에도 생체인식 정보를 담는 추세가 확산되면서다. 시장 상황도 좋다. 보안의식이 높아지고 효율성과 편리함 덕에 생체인식 관련 시장은 자연스레 커지고 있다. 나라마다 전자여권 또는 전자 주민등록증을 속속 도입하고 있다. 아파트 출입문부터 공항 출입국 심사대까지 지문인식이 일상생활을 파고들고 있다. 이런 훈풍을 타고 슈프리마는 전자여권 발급을 위한 여권판독기를 전국 구청과 재외 공관에 공급했다. 인천국제공항 내 항공사 카운터에도 슈프리마 제품이 깔렸다. 지문을 채취하는 라이브 스캐너는 한국과 일본 경찰청에 공급돼 범죄수사와 미아 신원확인에 쓰이고 있다. 이 라이브 스캐너는 지난해 아시아권에서는 처음으로 연방수사국(FBI)의 인증을 받았다. 세계 표준으로 인정되고 있는 FBI 인증 덕에 슈프리마는 각국 공공사업 시장을 뚫을 수 있었다. 지난 5일에는 미국 상무부 산하 인구통계청과 142만달러(16억5995만원) 규모의 지문 라이브 스캐너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슈프리마는 '2010년 센서스 조사'를 위해 고용된 계약직 130만며의 신원확인을 위한 '리얼스캔-10'을 미전역 신원확인센터에 공급하면서 최대 난관이라 여겼던 미국 시장에 교두보를 확보하게 됐다. 이번 계약을 계기로 추가 수주가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다. 지난해 인도 전자주민등록용 지문 데이터베이스(DB) 브라질과 필리핀의 전자투표용 지문DB 이란과 콜롬비아 경찰청의 출입보안 시스템 멕시코 육군의 군사시설 신원확인용 시스템 사업을 수주했다. 2008년 매출액 224억6000만원 중 70%를 해외에서 거뒀다. "지문인식은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해 진입장벽이 높지만 일단 장벽을 넘은 기업들은 높은 마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 사장은 또다시 새로운 장벽을 넘으려 하고 있다. 얼굴.홍채 등 다른 생체인식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학 시절 전공인 센서 퓨전 분야를 살려 지문과 얼굴을 복합적으로 인식해 처리하는 기술을 개발할 계획이다. 그는 "오차율 1~2%인 지문인식과 15%대인 얼굴인식 기술을 합치면 오차를 많이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SF(공상과학소설) 영화에서나 보던 세상이 머지않아 펼쳐질 것"이라는 이 사장 거의 상상 수준의 혁신을 꿈꾸고 있다. 박현영 기자

2010-01-29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3] 휴대폰 부품업체 'KH바텍'

‘이노패스트 15’는 혁신(Innovative)과 고성장(Fast-Growing)을 주무기로 한 혁신형 고성장 기업을 가리킵니다.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세계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컨설팅도 함께 소개합니다. 핀란드의 노키아. 세계 최대의 휴대전화 메이커다. 고가 스마트폰 시장의 시장점유율은 3분기 현재 35%로 애플의 아이폰을 누르고 세계 1위다. 노키아의 간판 스마트폰은 N97과 N97미니. 이 모델의 핵심 부품은 '메이드 인 코리아'다. 바로 경북 구미에 본사를 둔 KH바텍이 납품하는 거다. 말이 쉬워 부품이지 정확히는 휴대전화의 주요 기능을 담당하는 장치다. 업계 용어로 '모듈'이라 한다. 2단계로 모니터를 밀어올리면 키보드가 나오도록 하는 슬라이딩 모듈이다. 노키아는 두 모델에 필요한 슬라이딩 모듈을 전량 KH바텍에서 사온다. 미국.유럽에서 히트한 삼성전자의 M550 모델에도 이 회사의 슬라이딩 모듈이 들어갔다. 경쟁 회사들이 같은 회사가 만든 모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경쟁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남광희(50) KH바텍 사장은 "슬라이딩.폴딩 등 휴대전화의 외형기술(Form Tech)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을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휴대전화 세계 1 2위인 노키아와 삼성전자를 고객으로 뒀으니 KH바텍의 실적은 따져볼 필요도 없다. 지난해 3분기 매출액은 1673억원으로 1년 전(685억원)에 비해 2.4배로 증가했다. 지난해 전체 매출은 창사 이래 최대인 5000억원 정도. 영업이익도 308억원으로 지난해 3분기(133억7700만원)보다 2.3배로 늘었다. 우리투자증권의 이승혁 애널리스트는 "노키아로의 납품 비중이 늘면서 KH바텍은 명실공히 글로벌 휴대전화 부품업체로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남 사장은 차분하다. "회사 경영은 페달 밟기를 멈추면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자전거 타기와 비슷합니다. 우리 기술이 지금은 세계 최고라고 자신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벤처에 강한 이스라엘의 벽지 어디선가 새로운 기술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죠. 쉬고 싶어도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 냉철한 현실인식은 아픈 경험에서 비롯했다. 2002년 5월 코스닥시장 상장 당시 KH바텍은 탁월한 기술력과 성장성으로 주목받았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폴더형 휴대전화의 힌지(경첩) 기술과 고급 제품에 사용되는 마그네슘 외장제 구동부품 등을 결합한 조립모듈 부문에서 KH바텍은 경쟁업체를 한 발 앞서 있었다. 그 덕분에 2003년 한국의 유망 성장기업으로 선정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소개되기도 했다. 남 사장은 "WSJ에 기사가 게재된 이후 해외 기업설명회를 하면 유명 연예인 같은 대접을 받곤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KH바텍의 휴대전화 부품 90%를 사가던 삼성전자가 공급망을 다변화했기 때문이다. 실적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사업을 집중 육성하는 삼성전자의 꼬리에 매달려 성장하는 전략은 현재로선 좋은 모델이지만 앞으로도 유효할 것인지는 의문"이라던 WSJ의 전망이 현실화된 것이다. 2004년 1016억원이었던 매출은 이듬해 833억원으로 떨어졌고 1992년 창사 이후 첫 적자를 냈다. 2004년 16.6%였던 영업이익률은 0.11%로 추락했다. 1000원어치를 팔아봐야 1.1원밖에 남지 않으니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그는 "직원들과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고민했지만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좁은 국내시장을 벗어나 세계 무대로 나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해외 공급망을 뚫기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번번이 허사로 끝났다. 어렵사리 독일 지멘스를 잡긴 잡았다. 하지만 지멘스의 휴대전화 사업부가 대만 회사로 넘어가는 바람에 40여억원의 손실만 입었다. 모토로라의 휴대전화 사업도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또 2007년 말 노키아를 뚫었지만 제품 평가에만 1년이 걸린다는 답변이 날아왔다. 그러다 2008년 남 사장은 운명처럼 기회를 잡았다. 중저가 휴대전화에 집중하던 노키아가 삼성전자.LG전자에 쫓기자 중고가 제품을 생산하기로 한 것. 그러나 기존 부품 공급업체에서 만족할 만한 제품을 찾지 못하자 노키아는 KH바텍으로 눈을 돌렸다. "해외 경쟁업체는 3개월이 걸리는 시제품을 2주 만에 납품했더니 노키아가 깜짝 놀라더군요. 즉시 계약이 성사됐고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했지요. 노키아로선 이례적인 결정이었습니다." 한번 눈도장을 확실히 찍자 노키아의 시선은 180도 달라졌다. 이제는 노키아가 제품개발 단계에서부터 KH바텍을 참여시키고 있다. 기술력을 인정해준다는 얘기다. KH바텍의 기술진이 노키아 본사의 연구개발센터에서 아이디어.기술 설명회를 여는 일도 잦아졌다. 급격히 줄었던 삼성전자에 대한 매출도 이젠 전체의 2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한 곳이 막히면 다른 곳에서 활로를 뚫는 사업구조를 만든 것이다. 달성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하고 설정했던 '연간 매출 성장률 30% 영업이익률 16%'란 목표도 지난해 이뤘다. 실적이 좋아지자 지난해는 직원 성과급도 비교적 넉넉하게 돌려줄 수 있었다. 이게 남 사장에겐 큰 보람이다. '성공의 열매를 직원들과 함께 나누자'는 그의 경영철학 혁신적인 기술력으로 실천하게 된 것이다. 기술력 하나로 절망을 딛고 일어섰지만 남 사장은 오늘의 성공을 운으로 돌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기회가 오지 않는 회사가 많은데 나는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운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도록 자전거 페달을 밟을 겁니다." 특별취재팀

2010-01-22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2] 신발제조업체 확산

‘한국 대표기업’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작지만 강한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통해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명할 예정입니다. 월 440만원. 신발.의류 제조업체 학산의 이원목(58.사진) 사장이 받는 월급이다. 회사를 세운 1988년부터 21년째 한 푼도 올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올릴 생각이 없다. 사장 전용차도 없다. 지난해 추석엔 차례만 지내고 해외 출장 길에 올랐다. 장정 여럿이 양껏 먹을 만큼의 음식을 싸들고서다. 학산은 부산 공장 외에 중국 칭다오과 베트남 호찌민에 공장을 두고 있다. 그는 "고생하는 내 새끼들 보러 간다"고 말했다. 헌신적인 산업화 1세대 최고경영자(CEO)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이 사장은 여기서 한걸음 더 진화했다. 연구개발과 혁신의 유전자를 더한 것이다. 그는 자체 공장도 없는 상태에서 연구개발실부터 만들었다. 학산에 하청을 준 외국업체의 눈총을 피해 자체 브랜드를 만드느라 추운 겨울 허름한 창고에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렇게 자체 브랜드 '비트로('빛으로'의 변형)'를 만들어내는 데 꼬박 6년이 걸렸다. 그는 "자체 공장을 갖기 전에 연구개발실부터 만든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본사 인력의 17%가 연구개발과 디자인을 맡는다. 세계적 컨설팅회사 딜로이트와 중앙일보가 선정한 '이노패스트' 학산의 처음과 끝은 CEO 이원목이다. '레드오션'으로 취급되는 신발시장에서 2008년 42%의 매출 성장률을 보인 그는 경영자의 최고 가치로 '도전'을 꼽는다. 주문자 생산방식(OEM)으로 납품만 해도 떼돈을 버는데 그는 기뻐하지도 만족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OEM으로 얻은 이익은 허수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유명 브랜드의 하청으로는 미래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국에 나이키 독일에 아디다스가 있다면 한국엔 비트로가 있다"는 게 그의 목표이자 자부심이다. 핵심은 신발이다. 그는 "나이키 같은 스포츠 브랜드들이 옷.신발.스포츠용품을 함께 팔아도 광고는 늘 신발만 한다"고 말한다. 독자 브랜드 꿈은 이미 꽤 여물었다. 배드민턴.테니스화에선 이미 세계 일류 제품을 만들고 있다. 세계적 브랜드 틈새에서 이룬 한국 1등이다. 스포츠 시장은 새 브랜드가 진입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다. 비결은 딴 게 없다. 흙 바닥에서 뛰어도 덜 닿도록 신발 바닥의 품질을 높였다. 한국.중국.베트남 3개국에서 첨단 소재인 고어텍스로 신발을 만들 수 있는 허가권을 모두 보유한 신발 회사는 학산이 유일하다. 품질은 수익으로 이어졌다. 2008년 자기자본 대비 이익률(17%)은 2007년보다 10배나 올랐다. 그래도 그에겐 성이 차지 않는다. "스포츠 브랜드는 그 나라 문화의 상징이자 자부심이다. 스포츠 용품의 기능은 계속 진화할 수 밖에 없다." 학산은 사람 신발이 아닌 개 신발도 만든다. 고도의 접착 기술이 필요해 해외 업체들이 모두 포기한 애완견 신발을 연간 12만 세트씩 수출한다. 그는 진반 농반 말한다. "사람은 발이 두 개지만 개는 발이 네 개잖아. 하나만 팔아도 두 배야. 이 시장이 커지면 엄청날거야." 그러곤 다시 정색을 하며 강조한다. "더 이상 신발 산업을 사양산업이라 부르지 말라." 많은 어부가 떠난 바다에서 대어를 낚겠다는 그는 독하다. 겨울에는 사장실 창문을 열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로 시작되는 뻔한 레퍼토리가 아니다. "나는 나를 극한상황에 갖다 놓는다. 이건 효율과는 다른 문제야. 정신의 문제지." OEM 생산을 하며 6년간 주문업체 몰래 자체 브랜드 개발을 한 것도 이런 정신에서 시작됐다. 자체 브랜드의 판매가 늘어나자 2003년 한 외국계 스포츠 브랜드가 'OEM 제품을 더 이상 납품하지 말라'고 보낸 통지문을 그는 지금도 책상 서랍에 두고 있다. 훈장이자 각성제다. 고집불통일 법한데 그는 현실적이다. 학산에 변화가 가능한 이유다. OEM을 벗어나는 게 꿈이지만 OEM으로 실력을 쌓고 자체 브랜드를 개발할 자금을 모았다. 비트로 매장에는 비트로 제품 뿐 아니라 해외 브랜드 제품도 같이 판다. 비트로가 아직 약한 스포츠 캐주얼류를 보완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 제휴를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제품이라고 애국심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생소한 브랜드 '비트로'를 들고 전국의 테니스.배드민턴 동호회를 찾아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는 자신이 독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고민이다. "내 캐릭터가 강하다 보니 밑에 사람이 안 큰다. 이제 허리 부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적극적으로 사람에 투자하려고 한다." 다시 혁신이 화두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을 작정이다. 그는 "사업을 해야지 도박을 할 순 없다"고 말한다. 그가 정한 성장의 속도는 "(기업의) 심장이 터지지 않을 만큼"이다. 또 한 가지 지론도 있다. "한국에선 경쟁력이 없다고 다들 해외로 옮기는데 생산 거점은 반드시 한국에 있어야 한다. 한국 거점을 없애면 위기에 처했을 때 기댈 곳이 없어진다." 특별취재팀

2010-01-15

[중앙일보-딜로이트 공동기획 '이노패스트 15'-1] 네오세미테크

‘이노패스트’는 혁신(Innovation)을 바탕으로 고성장(Fast-Growing)하고 있는 기업을 가리킵니다. ‘한국의 대표기업’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중견·중소 기업들입니다. 중앙일보는 15개 이노패스트 기업의 창업·성장 스토리를 소개하고, 이들에 대한 딜로이트의 전문적인 컨설팅을 곁들임으로써 기업가 정신이 기업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조명할 예정입니다. 또 매년 이들 기업의 성과를 다시 취재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분석해 나가겠습니다. "2011년 매출은 적게 잡아도 1조원은 넘을 겁니다." 인천에 본사를 둔 네오세미테크의 오명환(50.사진) 사장이 내놓은 2년 후의 매출 전망치다. 그런데 지난해 이 회사의 매출액은 2500억원. 불과 2년 만에 매출을 네 배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거다. 당장 경기가 어찌 될지도 모르는 판에. "1조원 절대 허풍이 아닙니다." 그가 과거 자료를 내민다. 2002년 이후 2007년까지 이 회사의 매출은 100억~300억원대였다. 그러나 2008년엔 1032억원으로 전년(314억원)의 세 배 가까이 늘었다. 이게 2009년에는 전년의 2.5배로 뛰었다. 이런 추세라면 향후 2년간 두 배씩 성장해 1조원 매출도 어렵지 않다는 얘기다. 물론 그의 전망은 그렇게 단순한 어림셈에서 나온 게 아니다. 기술과 가격 경쟁력이 그의 자신감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린 에너지 열풍이 불면서 각광받고 있는 산업이 태양광 발전과 발광다이오드(LED) 분야입니다. 남들은 하나를 잘하기도 어렵지만 우리는 두 분야에서 핵심기술을 가지고 있지요." 이 회사는 태양전지와 LED의 재료로 사용되는 반도체 잉곳(덩어리) 전문 제조업체다. 오 사장은 "LED용과 태양전지용 반도체를 모두 생산하는 회사는 전 세계에서 우리 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재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은 태양광용 실리콘반도체다. 매출의 80%가 여기서 나온다. 문제는 기술장벽이 그리 높지 않은 품목이라는 거다. 경쟁이 치열해져 금세 '레드오션'이 될 위험이 있다. 태양전지 시장의 과잉 공급이나 각국의 정책 변경 등으로 비틀거릴 수도 있다. 그래도 오 사장은 걱정하지 않는다. 태양광용 반도체 잉곳의 매출이 주춤하면 즉각 LED용 반도체로 방향을 틀 수 있기 때문이다. 네오세미테크는 최근 대만의 두 개 회사에 LED용 반도체 웨이퍼 1억6400만 달러(약 1900억원)어치를 3년간 공급하기로 하는 등 공급 계약을 잇따라 맺었다. 또 언제라도 양산에 돌입할 준비가 된 첨단 반도체 잉곳 기술도 여럿 보유하고 있다. 하나가 막히더라도 제2 제3의 동력이 준비돼 있다는 것이다. 네오세미테크가 특히 주목받고 있는 것은 압도적인 수익력이다. 오 사장은 "우리 제품의 생산단가는 경쟁사보다 30~60% 정도 낮다"며 "세계적인 불경기 속에서도 내년에 4 5공장을 짓는 건 품질과 가격 경쟁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가격 경쟁력의 비밀은 이 회사가 2002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연속공정법'이란 기술에 있다. 1300도의 고온에서 연속적으로 반도체 잉곳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를 통해 잉곳 한 개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이 300시간에서 40시간으로 단축됐다. 시간은 효율로 효율은 곧 수익으로 이어졌다. 네오세미테크의 영업이익률(매출 대비 영업이익의 비율)은 지난해 35%. 즉 1000원어치를 팔아 350원을 남겼다는 얘기다. 2008년 결산 한국 563개 상장사는 평균해 1000원어치를 팔아 38.7원을 남겼다. 2000년 창업 후 2년도 안 돼 이런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결정적인 것은 역시 오 사장의 전문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1984년부터 LG전선(현 LS전선)에서 10여 년간 갈륨비소 연구에 매달렸다. 2000여 편의 해외논문을 독파했고 갈륨비소로 박사논문도 썼다. 전 세계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일본 업체들과 상담하느라 수시로 일본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회사가 갈륨비소 연구를 중단하자 그는 독립했다. "창업 후 처음엔 반도체용 장비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이걸로도 벌이가 쏠쏠했지만 갈륨비소 반도체 개발에 대한 아쉬움을 늘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갈륨비소는 초기 자금만 100억원 넘게 드는 까닭에 엄두를 못 냈습니다. 그런데 벤처 붐 영향으로 투자자가 나서면서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고 결국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게 됐습니다." 갈륨비소 반도체를 팔아 첫해부터 이익을 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회사를 한 단계 상승시키기 어려웠다. 이미 해외 선발 회사들이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고 추가 연구엔 끊임없이 거액이 필요했다. 그러다 2005년 네오세미테크의 갈륨비소 제조 기술을 잘 알고 있는 한 해외업체가 "태양광 실리콘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제안해왔다. 오 사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적시에 투자와 개발을 했고 이를 통해 1000억원 매출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럼 세계시장에 네오세미테크의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 오 사장의 말을 빌리자면 "이제 태양광.LED용 반도체에서 기술독립을 선언할 정도가 됐을 뿐"이란다. 그러나 그는 "세계 시장 점유율 10%만 넘기면 그때부터 절반으로 끌어올리는 건 쉽다"며 "한국이 화합물 반도체의 강자로 부상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201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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